아동예술교육

태블릿보다 크레파스가 먼저여야 하는 이유

앙버스 2025. 5. 14. 03:30
디지털 시대, 아이의 감각은 어디서 자라야 할까?

 

요즘 아이들을 보면, 손보다 화면이 먼저 익숙해요. 두 살이 채 되기 전에 유튜브 키즈 앱을 능숙하게 넘기고, 알파벳 노래나 캐릭터 이름을 줄줄 외우는 모습을 보면 “이렇게 똑똑할 수 있나?” 싶을 정도죠. 실제로 많은 부모들은 그런 모습을 보고 ‘우리 아이가 언어도 빠르고 인지력도 뛰어나구나’라고 생각해요. 분명 맞는 말이에요. 그런데 아이가 점점 자라면서 이상한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감정을 표현하는 게 어색하거나, 친구와 어울리는 데에 어려움을 보이거나, 뭔가를 깊이 있게 관찰하거나 오래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불안해지죠. "혹시 너무 화면에만 익숙해서 그런 걸까?" 그런 생각이 슬며시 올라오기도 해요.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디지털 기기에 너무 이른 시기부터 노출되고 있고, 그게 생활의 중심처럼 되어버린 경우도 많아요. 반면에 손으로 뭔가를 만지거나, 천천히 색을 고르고, 종이에 무언가를 표현하는 ‘아날로그 경험’은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하지만 아이의 감각, 감정, 창의력은 스크린이 아니라 ‘손’과 ‘몸’에서부터 시작돼요. 그래서 지금 시대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태블릿보다 먼저 ‘크레파스’예요. 왜 그런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볼게요. 이번 글에서는 아날로그 예술교육이 디지털 세대 아이들에게 왜 꼭 필요한지, 주요 관점으로 풀어보려 해요.

태블릿보다 크레파스가 먼저여야 하는 이유

감각은 손끝에서 자라고, 손은 감정을 꺼내주는 도구!

디지털 기기와의 상호작용은 대부분 ‘시각 중심’이에요. 스크린을 보고, 소리를 듣고, 터치 하나로 반응을 얻죠. 반면에 크레파스, 물감, 찰흙 같은 예술 재료는 아이의 손 전체를 사용하게 만들어요. 꾹 눌러 그리거나, 문지르고, 점을 찍고, 선을 긋는 모든 동작이 손의 힘 조절, 촉감 인식, 공간 감각을 자극해요. 이런 손끝의 움직임은 단순한 미세운동이 아니라, 두뇌를 직접 자극하는 감각 통로예요.

특히 유아기에는 감정이 말로 표현되기 전에 몸으로 먼저 반응해요. 그래서 아이가 그림을 그릴 때 손의 움직임은 곧 마음의 움직임이기도 해요. 세게 칠하거나, 반복적으로 덧칠하거나, 아무 색도 고르지 못하고 멈춰 있는 모습에서 아이의 감정 상태가 드러나요. 이처럼 크레파스 한 자루는 단순한 미술 도구가 아니라, 아이의 감정을 꺼내주는 중요한 감각 매개체예요."감정은 감각을 통해 표현되고, 감각은 손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건 어떤 심리치료 교재에도 나오는 기본이자 본질인 것 같아요.

디지털은 ‘실수 없는 세계’, 예술은 ‘실수를 통한 성장’

디지털 화면에서는 실수가 없어요. 그려놓은 걸 두 손가락으로 지우면 끝이고, 버튼만 누르면 되돌릴 수 있어요. 물론 그건 편리하죠. 하지만 아이는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해요. 크레파스로 그린 선은 쉽게 지워지지 않고, 색이 섞이면 다시 되돌릴 수 없어요. 이 과정을 통해 아이는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했는지,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돼요.

예를 들어, “노란색 위에 파란색을 칠했더니 초록색이 됐어!” 이건 그냥 색 놀이가 아니라, 행동-반응의 결과를 몸으로 익히는 경험이에요. 실수도 해보고, ‘다음엔 이렇게 해봐야지’ 하며 시도도 해보는 과정은 바로 자기주도 학습 + 창의성 훈련이에요. 반대로 화면 속 콘텐츠는 주어진 정답과 동작만을 따라가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의 창의성과 시도력은 점점 줄어들 수 있어요.

실수할 수 있는 자유가 아이를 창의적으로 만들고, 그 자유는 아날로그 예술교육에서만 가능해요.

 

감정 표현력은 그림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아요.

말이 늦거나, 표현이 서툰 아이일수록 미술 활동을 통해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크레파스, 물감, 찰흙처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재료는 아이에게 ‘언어 이전의 표현 수단’이 돼요. “화가 났을 때는 이렇게 그려요”, “기쁘면 빨간색만 써요” 같은 말들이 나오는 건, 감정을 색과 움직임으로 번역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디지털 화면은 감정을 자극하긴 해도, 아이 스스로 표현하고 풀어낼 통로를 제공하진 않아요. 유튜브 속 캐릭터는 웃거나 울지만, 아이는 거기에 반응만 할 뿐,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은 배우지 못해요. 반면에 크레파스를 꽉 쥐고 색을 반복해서 문지르며 “지금 화났어”라고 말하는 아이는, 이미 자기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건 정서 표현력 + 자기이해 능력을 동시에 길러주는 굉장히 중요한 기초예요.

 

집중력과 자기조절력은 천천히 만드는 과정에서 자라요.

디지털 콘텐츠는 빠르고 반복적이에요. 영상은 몇 초마다 장면이 바뀌고, 터치하면 즉각 반응이 와요. 이런 환경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뭔가 ‘금방 반응이 없는 상황’에 대한 내성이 떨어져요. 반대로 아날로그 미술 활동은 천천히 시작해서 천천히 끝나요. 색을 고르고, 도형을 채우고, 테두리를 그리고, 다시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해요.

이건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게 하려는 게 아니라, 몰입과 자제력, 계획성을 키우는 훈련이에요. 예를 들어 스케치북에 선을 따라 천천히 그려야 하는 활동은, 눈-손 협응뿐만 아니라 속도 조절력과 좌절 인내력을 자극해요. 디지털 환경에선 경험하기 어려운 감각이에요.

또한 부모와 함께 미술활동을 할 때 “이건 천천히 해보자”, “지금은 색을 섞는 시간이야”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되면, 그 자체가 자기조절력 언어 코칭으로 작용하게 돼요.

 

예술은 혼자 하는 활동 같지만, 결국은 ‘관계’ 속에서 성장해요.

많은 부모들이 아이에게 스마트폰을 줄 때 “혼자 잘 노니까 다행이다”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혼자’는 관계 없는 고립일 수도 있어요. 반대로 미술활동은 누군가와 꼭 말을 하지 않더라도 관계를 만드는 도구가 돼요. 함께 크레파스를 나누거나, 친구가 그린 걸 보고 “멋지다”고 말해주는 그 순간, 아이는 ‘타인을 인식하고 감정을 공유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림을 보여주고 “이건 무슨 기분으로 그린 거야?”, “여기에 이 색을 쓴 이유는 뭐야?”라고 묻는 대화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공감과 표현의 연결 고리가 돼요. 이런 연결은 아이의 사회성과 감정 인식 능력을 크게 키워줘요. 디지털 기기처럼 각자 화면에 빠져 있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표현하고 반응하는 경험이 쌓일수록 아이는 감정적으로도 더 건강하게 자라요.

 

우리는 아이에게 좋은 걸 주고 싶어 해요. 빠르게 배우고, 잘 따라하고,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모습을 보면 안심하기도 하죠.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아이가 ‘자기 감각으로 세상을 느끼고, 자기 속도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 거예요.
크레파스 한 자루, 하얀 도화지 한 장,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10분이 아이에겐 훨씬 큰 성장의 시간이 될 수 있어요. 디지털은 도구고, 감각은 본질이니까요.

디지털을 잘 쓰는 아이로 키우는 것도 좋지만, 그 전에 ‘자기 감정과 손, 눈, 몸의 연결을 경험한 아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건 어떨까요?

앞으로는 태블릿보다 크레파스와 더 친해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