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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예술교육

아이가 무채색만 쓸 때, 색이 말하는 마음의 변화

by 앙버스 2025. 5. 16.

“오늘도 까만색만 썼어요.”

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의 그림을 본 순간, 엄마는 한참 말이 없었어요. 도화지 전체를 덮은 회색, 검은색, 그리고 몇 가닥의 진한 남색 선. 선생님은 “요즘 아이가 계속 무채색만 고른다”고 말해주었죠.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아이는 색연필을 고를 때도 항상 검은색부터 꺼냈고, 물감놀이에서도 색을 섞지 않았어요. 무채색이라는 건 색이 없는 게 아니라, 색이 들어가기 전 상태예요. 아이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요?

색이 줄어드는 아이 – 실제 사례 셋

① “너무 시끄러워서 그리기 싫어요.” 7세 민재는 평소에는 밝은 색을 많이 쓰던 아이였지만,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자 갑자기 회색 위주로 그림을 채우기 시작했어요. “유치원에서 너무 시끄럽고 정신없다”고 말하던 민재는 색도, 말도 점점 줄어들었죠. ② “다른 애들이 웃을까 봐.” 5세 예나는 친구 앞에서 그림을 공개한 날부터 흰색 종이에 검은 연필로만 그리고, 끝나자마자 그림을 접어 가방에 넣기 시작했어요. “다른 애들이 뭐라고 할까 봐”라는 말이 그림에서도 느껴졌죠. ③ “그냥 그런 느낌이 나서요.” 6세 주완은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한동안 거의 회색과 검은색만 사용했어요. 이유를 묻자 “그냥 그런 느낌이 나서”라고 대답했죠. 감정을 말로 설명하진 못하지만, 색은 감정의 그림자를 드러내고 있었어요.

색은 감정의 결과예요

어른에게 색은 선택의 결과지만, 아이에게 색은 감정의 반응이에요. 색채심리학에서는 무채색 계열(흰색, 회색, 검정, 짙은 남색 등)을 반복적으로 선택하는 경우를 ‘내면의 불균형 신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 유아기에는 감정을 말보다 먼저 색으로 드러내는 경향이 강한데, 이 시기 무채색 선택은 내적 정리 중이거나, 감정 에너지가 줄어든 상태를 나타낼 수 있어요. 단순히 색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색이 지금 마음의 온도와 가장 가까워서 선택되는 거예요.

무채색 선택 뒤에 숨어 있는 3가지 심리

① 혼란과 소음 회피 환경이 복잡하거나 정서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아이는 시각 자극이 적은 색을 선택하며 자신을 보호하려 해요. 무채색은 눈에 덜 띄고 안정적인 자극을 주니까요. ② 자기 표현에 대한 불안 자신의 표현을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경험이 반복되면, 아이는 가장 안전하고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색을 고르게 돼요. 검정은 감정을 숨기기 쉬운 색이기도 하죠. ③ 감정 인식 능력 미성숙 특별히 우울하거나 불안한 건 아니지만, 현재 자신의 감정을 잘 인식하지 못할 때 무채색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어요. 감정의 이름이 없을 때, 색도 비워지는 거예요.

아이의 색 선택에 영향을 주는 부모의 반응

무채색을 반복해서 쓰는 아이를 보면 부모는 종종 걱정하거나 바로 질문해요. “왜 이렇게 어두운 색만 써?” “다른 색도 써봐야지” 같은 말은 사실 아이에게는 “지금 너의 마음은 이상해”로 들릴 수 있어요. 색은 말보다 민감하게 받아들여져요. 그래서 중요한 건 반응보다 관찰이에요. 그림을 보며 “이건 어떤 장면이야?”, “이 색을 보니까 엄마는 좀 조용한 느낌이 드네”라고 이야기해보세요. 색에 대해 묻기보다는, 그림 속 장면을 함께 바라보는 게 훨씬 안전하고 연결감을 줄 수 있어요.

무채색에서 컬러로, 아이 마음을 여는 예술활동

아이의 색 사용이 무채색에 머무를 때, 억지로 색을 늘리기보다는 색을 ‘다르게 경험하게’ 해주는 활동이 좋아요. 예를 들어, 투명 셀로판지를 겹쳐보며 색이 변하는 걸 보여주거나, 노래에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는 리듬컬러 놀이도 좋아요. 색에 대한 판단이 아닌 호기심을 느끼게 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색이 없는 그림책(예: 흑백 일러스트)에 아이가 원하는 색을 채워보게 하는 것도 좋아요. “이 장면에는 무슨 기분의 색을 넣고 싶어?”라는 질문은 아이가 스스로 마음을 찾는 길을 열어줘요.

색을 바꾸려 하지 말고, 마음을 만나주세요

어떤 색을 쓰든, 아이는 지금 마음속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거예요. 색을 바꾸는 게 아니라, 색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아이의 마음도 열릴 수 있어요. 무채색은 비어 있거나 부족한 게 아니라, 지금 그 아이에게 필요한 정서적 온도예요. 우리가 할 일은 ‘그 마음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에요. 아이가 감정을 색으로 알아가고, 다시 새로운 색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조용히 기다려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해요.

관찰의 순간들 – 부모들이 실제 경험한 이야기

“우리 아이는 분명 즐겁게 노는데도, 그림을 보면 항상 회색이에요.” “하루 종일 말도 많고 밝은 아이인데, 미술 시간엔 항상 검정만 써요.” “기분이 안 좋을 때도 무채색, 기분이 좋아도 무채색이에요.” 실제로 부모나 교사들이 자주 겪는 경험이에요. 감정은 보이는 것만으로 전부를 알 수 없고, 색은 겉모습과 다르게 작동하기도 해요. 어떤 아이는 외향적이어도 내면이 쉽게 지치고, 색은 그 리듬을 따라가요. 어떤 아이는 반복적으로 회색을 쓰지만 그것이 슬픔이 아니라 조용함이라고 느끼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색에 대해 단정하지 않고, 관찰하고 기록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한 가지 색이 모든 걸 말해주진 않지만, 색은 아이의 정서 상태를 가리키는 작은 힌트가 될 수 있어요.

반응하지 않고 기다리는 용기

아이가 반복적으로 무채색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개입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빠른 반응은 아이의 선택을 평가받는 느낌으로 만들 수 있어요. 중요한 건 ‘색에 반응하지 않는 기술’이에요. 감정은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만, 과도한 해석이나 걱정은 아이에게 부담을 줄 수 있어요. 검정색이 단지 집중하고 싶은 기분일 수도 있고, 회색이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은 기분일 수도 있어요. 아이가 무채색 안에서 스스로 머무르고 싶은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판단 없는 기다림이 필요해요. 이것이야말로 아이와 예술 사이에 놓인 진짜 연결이에요.

아이의 감정은 언젠가 색을 바꿔요

언젠가 아이는 아주 작은 색을 그림 속에 넣기 시작해요. 검은 배경에 분홍 점 하나, 회색 선 옆에 노란 선 하나. 그런 변화를 발견할 때, 아이의 마음 안에 공간이 생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어요. 그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마음의 여백을 만든 결과예요. 아이는 자기 속도를 따라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이 색이 되고, 다시 그 색이 세상과의 연결이 되는 거예요. 무채색은 시작일 뿐이에요. 우리는 그 변화의 작은 순간을 가장 먼저 지켜볼 수 있는 특별한 존재예요.